표의 문화사 - 1
#367
Replies: 1 comment
-
|
[원행을묘정리의궤 = 園幸乙卯整理儀軌] (https://memory.library.kr/dext/file/view/resource/105575) |
Beta Was this translation helpful? Give feedback.
0 replies
Sign up for free
to join this conversation on GitHub.
Already have an account?
Sign in to comment
Uh oh!
There was an error while loading. Please reload this page.
Uh oh!
There was an error while loading. Please reload this page.
-
셀 안에 갇힌 동아시아 — 표(表)로 읽는 文書 문화 ①
한·중·일 워드프로세서가 그려내는 길들
공무원 친구가 보내온 보고서를 열었다가 잠시 숨이 막혔다. A4 한 장에 표가 네 개. 그 중 두 개는 표 안에 또 표가 들어 있었고, 어떤 셀에는 음영이, 다른 셀에는 빗금이 쳐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본문은 마치 표와 표 사이를 미안한 듯 지나가는 손님 같았다. 한국 공문서를 본 외국인 동료가 "이게 정말 워드 문서냐, 아니면 잡지 레이아웃이냐"라고 물었을 때, 나는 쉽게 답하지 못했다.
한글과컴퓨터의 한글(HWP)은 일반 워드프로세서가 아니다. 셀 단위 크기 조절, 표 안의 표 중첩, 개별 셀 테두리 제어, 셀 내 계산식까지 — 거의 조판(組版) 프로그램에 준하는 기능을 품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라면 "그건 인디자인에서 하시지요"라고 정중히 거절할 작업들이, HWP에서는 단축키 두 번이면 끝난다.
이 과잉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흔한 해석은 "군사정권이 남긴 형식주의의 흔적"이다. 매력적인 가설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절반만 맞다 — 그리고 그 절반의 자리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우리가 짐작한 것보다 훨씬 깊은 강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의궤(儀軌)에서 HWP까지 — 격자의 긴 강
표 형식 문서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은 군사정권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를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를 펼쳐보면, 행렬에 참가한 인원의 직급·소속·역할이 칸칸이 정리되어 있다. 단순 명단이 아니라, 위계가 한눈에 드러나도록 설계된 시각 구조다. 정보의 정리이자, 동시에 그 정보가 놓인 질서를 보이는 일이었다. 21세기 공무원이 엑셀로 만드는 출장 정산서와 격자의 형태는 다르지 않다 — 다만 그 격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사뭇 다른 질문일 수 있다.
조선의 등록(謄錄)과 의궤는 정보를 흐름이 아니라 격자로 정리하는 사고방식을 제도화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일본식 품의제(稟議制) — 아래에서 기안하여 위로 도장을 받아 올라가는 결재 방식 — 가 이 위에 결재란이라는 또 하나의 격자를 얹었다. 군사정권의 행정 효율화 정책은 이 모든 것을 표준 서식으로 통일했다. 토양은 조선이, 골격은 일제가, 광택은 군사정권이 입힌 셈이다.
HWP는 이 다층적 유산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에 항복한 도구다. 1989년 출시 당시 이미 공문서, 품의서, 결재란이라는 격자 문화는 관료 사회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고, 한글과컴퓨터는 그 요구를 정직하게 받아냈을 뿐이다. 워드가 "문서는 흐르는 텍스트"라는 서구의 전제에서 출발했다면, HWP는 "문서는 칸과 칸의 조합"이라는 한국 관공서의 전제 위에서 진화했다.
같은 뿌리, 다른 길 — 중국의 분기
흥미롭게도, 표 형식 행정 문서의 원조는 중국이다. 한대(漢代)의 간독(簡牘) 문서부터 호적과 부세(賦稅) 장부가 칸을 나눠 정리되었고, 명청대의 어린도책(魚鱗圖冊)과 황책(黃冊)은 그야말로 거대한 종이 스프레드시트였다. 조선이 수입한 관료 문서 양식의 원본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현대 중국의 워드프로세서는 다른 길을 갔다. 가장 널리 쓰이는 WPS Office는 본질적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호환을 목표로 만들어진 제품이다. 1990년대 중반 MS 오피스가 글로벌 표준으로 진입할 때, 중국 PC 보급은 아직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시장이 무르익었을 때는 이미 늦었던 셈이다. 한국의 HWP(1989)와 일본의 一太郎(1985)이 자국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또한 중국 공문서(公文)는 표보다 정형화된 텍스트 블록 중심으로 진화했다. 제목, 주송기관(主送機關), 정문(正文), 낙관(落款)이라는 정해진 흐름이 있을 뿐, 한국 공문서처럼 결재란이 시각적으로 강조되지 않는다. 복잡한 표가 필요한 영역은 일찍부터 엑셀로 분리되었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도구의 진화 경로는 시장과 제도가 갈랐다.
한·일의 분기 — 조판의 미학과 정보의 미학
한국과 일본은 같은 토양에서 출발했지만 정반대의 미감으로 분화했다.
일본의 표는 조판으로서의 표에 가깝다. 一太郎과 워드 일본어판 모두 세선·중선·태선·이중선·점선을 정밀하게 구분하고, 외곽선과 내부선의 굵기 대비에 신경을 쓴다. 셀 안에 의도적으로 여백을 남기고, 글자 주변에 숨 쉴 공간을 둔다. 표 하나가 版面設計(판면 디자인)의 대상이다. 신문과 법정 문서에 여전히 살아 있는 세로쓰기 전통이 표 엔진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정보가 복잡할 때는 본문 표를 단순하게 유지하면서 별표(別表)로 첨부하는 분할 미학이 발달했다. 도장조차 미학의 일부가 되어, 상사를 향해 살짝 기울여 찍는 お辞儀ハンコ(인사하는 도장) 관행이 2020년 河野太郎 행정개혁상의 폐지 캠페인 전까지 남아 있었다. 비효율의 극치였지만, 또한 형식 미학의 정점이기도 했다.
한국의 표는 정보 컨테이너로서의 표에 가깝다. 셀 안을 꽉 채운다. 여백이 있으면 정보가 부족해 보인다는 강박이 있다. 외곽은 굵게, 내부는 가늘게 — 그것으로 끝나고, 대신 셀 배경에 회색과 하늘색 음영을 깔아 항목과 데이터를 구분한다. 표 하나로 부족하면 표 안에 표를 중첩시킨다. 한 페이지에 정보를 최대한 압축해 넣는 것이 미덕이다. 1980년대 이후 가로쓰기로 거의 완전히 통일되며 한 줄에 더 많은 칸을 넣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일본이 서도(書道)와 조판의 길을 갔다면, 한국은 행정 효율과 정보 밀도의 길을 갔다 —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다.
풍경 너머로
이 모든 것을 낡은 형식주의나 비효율로 일축하기는 쉽다. 그러나 조선 의궤의 후예가 21세기 PDF 보고서 안에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한 잔재 이상을 함축한다. 의궤를 그린 사관에게, 결재란에 도장을 찍은 조선 관료에게, 품의서에 인장을 찍은 일제 시대 행정가에게, 그리고 지금 HWP의 정교한 표 엔진을 다루는 21세기 공무원에게 — 같은 손동작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것이 단지 비효율의 누적이라면 이미 진작 사라졌을 것이다.
다만 짚어 둘 것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미감 차이를 조판이냐 정보냐로 정리한 것은 — 정확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결과적인 모습일 뿐, 왜 그렇게 갈라졌는가는 아직 답하지 않았다. 같은 뿌리에서 어떻게 두 사회가 정반대의 시각적 미덕을 발전시키게 되었는가. 일본은 왜 도장을 기울여서 찍는 데까지 갔고, 한국은 왜 결재란을 가로로 펼치는 쪽을 택했는가. 이런 차이는 단순한 디자인 선택이 아닐 것이다.
칸은 정보를 담는 그릇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릇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이 글의 끝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의궤를 그린 사관부터 21세기 공무원까지 이어지는 이 긴 강물 앞에서, 비효율이라는 단어 하나로 강을 건너뛰지 않기로 한다. 강이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깊이의 끝에 무엇이 가라앉아 있는지 — 그것을 따라가 보는 일이, 여기서 시작된다.
#368
Beta Was this translation helpful? Give feedback.
All reactions